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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를 정의하다

     그랑

 수요일 4교시, 시원하다 못해 차가운 에어컨 바람에 몸을 부르르 떨던 지성은 두 손으로 제 팔을 쓱쓱 문지르며 교실 안은 휙 둘러보았다. 조용하기 그지없는 교실은 자습을 주고 사라진 선생님 덕에 책상에 널브러진 고등학교 2학년들은 가득했지만 아쉽게도 남아있는 겉옷이나 담요를 자신에게 빌려줄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에어컨 온도를 낮출까 싶다가도 학생들의 무분별한 에너지 사용을 막겠다며 중앙제어 시스템을 설치한 학교에서 에어컨 온도를 낮추려면 직접 저 후덥지근한 복도를 지나 행정실까지 내려가 사정을 봐주십사 설명해 드려야 한다는 생각에 다리에 준 힘을 풀어 다시 딱딱한 나무 의자에 몸을 올려놓았다. 이 얼어 죽을 상황에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이 하나 없다는 상황이 서러워 눈물까지 날 것만 같다는 생각에 괜히 코를 한 번 훌쩍이고 보니 근래 조금이라도 서러웠던 일들이 머릿속으로 와르르 쏟아져 내렸다. 어제 제노 형이 공부해야 한다고 혼자 가라고 한 것, 그저께 제노 형이 매점에서 아이스크림을 7개 사와 놓고는 제 것은 없다고 한 것, 지난주에 제노 형이 들고 있는 빵 보고 맛있겠다고 하니까 홀라당 절반을 입안에 쑤셔 넣은 것, 지지난 주에 제노 형이...파묻힐 담요가 없어 줄줄이 튀어나오는 서러움 속에라도 그대로 파묻히려던 지성은 문득 제 경로를 확 틀어버린 생각에 책상과 밀착되어있던 몸을 벌떡 일으켜 세웠다.

 

 

 "다 제노 형이잖아..."

 

 

 손가락 사이사이에 머리카락을 끼우고는 낑낑대며, 지성은 생각했다. 이제노 당신이 이 모든 서러움의 근원이라고.

 

 

 그렇게 한 번 물꼬가 터진 이제노에 대한 서러움은 끝을 모르고 술술 흘러나왔다. 지성은 세삼 자신이 자신의 애인에 대해 갖고 있던 불만 사항들에 대해 놀랐다. 생각하기를 좋아하는 제가 이렇게나 제 연애에 대한 생각을 미뤄왔다니. 지성이 제 과오를 깨닫자마자 지난 시간에 대한 후회가 물밀듯 터져 나와 불만 사항과 뒤섞여 늪을 만들었다. 그리고 지성은 그 늪에 반항 한번 없이 빨려 들어가며 생각했다. 이 기회에 기필코 이 늪의 바닥까지 생각하겠다 다짐하며.

 

 

 그렇게 한참을 눈을 감고 입은 댓 발 나온 채로 제 머릿속 생각들에 집중하던 지성은 어느 한 지점을 종착역 삼아 멈췄다. 배경은 지난 주 토요일, 시험이 끝난 후 첫 주말을 맞아 이제노의 자취방에서 한 홈 데이트 현장이었다. 둘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시답지 않은 내용으로 말놀이를 하고 있었다. 제가 하는 말에 이제노가 은근 뼈를 담은 묵직한 펀치를 날리고, 저 또한 이제노의 말에 제노잼이라며 낄낄대면서도 손은 손깍지까지 단단히 낀 채로 장난기 가득한 애정을 주고받았다. 평소와 무엇 하나 다른 것이 없던 데이트였고 그렇기에 그때는 아무런 불만 없이 웃어넘겼건만, 제 연애에 대해 회의감과 의구심이 들고 있는 지금은 이야기가 달랐다.

 

 

 아이고, 똥손아. 그래가지고 부서지겠냐.

 

 이건 애인이 들이민 주둥이를 피하고 깔깔대며 웃다가 매트리스 위에 간당간당하게 얹어져 있던 핸드폰을 바닥으로 날려버리자, 눈을 곱게 접어가며 비웃음과 함께 제게 날린 말이었고,

 

 하여간 박지성, 누가 바보 아니랄까 봐 티 내는 거 봐.

 

 이건 얼떨결에 어김없이 평균보다 아래에 머무는 제 시험점수를 발설하니, 숨넘어갈 듯 웃더니 제 머리를 잔뜩 헤집으며 한 말이었다.

 

 

 그 밖에도 제가 피자를 먹자고 하니 살찐다 뭐한다 잔소리를 왕창 퍼부은 일, 저와 함께 있다는 말에 전화기 넘어서까지 들릴 정도로 우리 귀여운 지성이를 외치는 재민이 형에게 얘가 뭐가 귀엽냐며 급히 전화를 끊은 일, 그 말에 제가 삐지자 덩칫값 못한다며 한 소리 한 일, 그리고 또...수많은 데이트 중 하루이건만 불만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줄줄이 딸려 나왔다. 분명 아까 전까지만 해도 토요일만 생각하면 절로 올라가 실실대던 입꼬리가 이젠 바닥을 향해 급하강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입꼬리 부근의 근육이 아파질 때쯤, 결론을 내렸다. 이 연애는 잘못되었다고.

 

 

 

*

 

 

 

 오늘로써 3일째 이제노를 피하고 있는 박지성은 요즘 따라 자주 눈앞에 아른거리는 눈웃음을 떠올리다가 고개를 휘휘 저어 머릿속을 비웠다. 이제노가 마냥 좋을 때는 그 눈웃음이 그리도 좋더니만, 이 꼴이 나고 보니 그 눈웃음이라는 것이 가장 쓸데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 의사는 깡그리 무시한 채 시도 때도 없이 떠올라 제 마음을 정리하는 것을 방해하는데, 이게 쓸데없는 게 아니고서야 무엇일까.

 

 아, 또 이제노 생각이잖아.

 

 생각 기차가 돌아돌아 결국 또 종착점이 이제노인 것에 대해, 박지성은 무척이나 불만이 많았다. 분명 같이 배그하자는 이제노의 제안을 거절하는 것도, 같이 하던 등하교를 온갖 핑계를 대고 피하는 것도, 줄넘기를 빌려주는 동혁이 형의 놀림을 들으면서까지 이제노에게 부탁하지 않는 것도, 무엇 하나 어려운 것이 없었는데 유일하게 제 의사를 따라주지 않는 것이 제 생각 기차였다. 제 연애에 대한 온갖 근심걱정을 보따리째 싸들고 칙칙폭폭 운행하면 제대로 된 종착역에 도착해야 할 것이 매번 탈선사고를 일으키며 이제노라는 영역에서 벗어나질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덕에 지성은 제 연애에 대해 결론 하나 제대로 내리지 못하고 3일을 끙끙대며 머리만 싸매고 있었다. 분명 제 연애에 대한 재정비가 필요하다는 생각에 아까도 이제노가 아이스크림 쏜다며 나오라는 인준이 형의 말에 배 아프다고 거절했건만 교실에서 혼자 쓸쓸히 책상에 엎어져 있으려니 재정비고 뭐고 다 때려치우고 전처럼 아무것도 모른 채 연애를 즐기고 싶다는 생각이 불쑥 튀어나왔다. 그리고 또다시 이 모든 게 이제노가 원인이라는 생각에, 지성은 서러움에 아주 조금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그렇게 깜빡 잠이 들었다.

 

 

 천러피셜 왕머리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저리는 팔에 잠이 깬 지성은 신경질적으로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눈이 마주쳤다. 누구랑? 이제노랑. 그것도 오늘 하루 종일 지성의 머릿속을 지배했던 눈웃음이라고는 하나 없는 정색한 이제노랑. 본능적으로 일이 잘못되었음을 느낀 지성은 제 바로 앞 의자에 앉아 저를 응시하는 제노와 조금이라고 멀어지려고 슬금슬금 몸을 살짝 뒤로 뺐다. 이제노가 눈치채지 못하도록 최대한 천천히, 그리고 조심스럽게. 하지만 이런 지성의 노력은 허사였는지 무표정한 얼굴이 뱉어낸 말은 그대로 지성의 몸을 꽁꽁 묶어놓았다.

 

 

 "또 피해?"

 

 "뭐, 내가 언제 피했다고...요...."

 

 "그걸 내 입으로 굳이 설명해야 할까?"

 

 

 한 번도 본 적 없는 차가운 말투와 표정에 그야말로 좆됐다는 말이 무엇인지 실감한 지성은 재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제 눈앞에 애인이랑 끝낼 생각은 아니었으나 지금 제 머릿속에 정리가 되지 않은 생각들은 헤어지자는 말로 받아들여질 것이 뻔했기에 어떻게 해서든 이 위기를 모면해야 했다. 보다 부드럽고 자연스럽고 서로 상처를 받지 않을 그럴듯한 핑계를 찾을 시간을 벌기 위해 지성은 우선 되는 대로 말을 뱉었다.

 

 

 "형이 왜 여기 있어요? 여기 우리 반인데."

 

 "수업 다 끝났는데도 푹 자고 있는 애 데리러 왔다, 왜."

 

 "헐? 수업 다 끝났어요?"

 

 "교실이 텅 빈 건 안 보이나 보다, 지성아."

 

 

 지성은 제노의 굳은 얼굴에 박혀있던 시선을 떼어내 교실을 쭉 둘러보았다. 오바. 정말 아무도 없었다. 교실 벽에 달린 시간이 6시를 향해 달려가고 있는 것을 확인한 지성은 그제야 규칙은 철저하게 지키는 본투비 FM맨 이제노가 당당하게 2학년 교실에 들어와서 저와 마주 보고 있었는지를 이해할 수 있었다. 수업이 끝나고 주변 눈치를 보던 이제노는 2학년들이 다 하교하자마자 담임한테 허락을 받고 들어왔겠지. 수업이 끝난 지 1시간 가까이 지나있으니 오래도 기다렸다 싶은 생각에 지성은 잠들기 전에 그 고깝고 서러운 마음은 다 어디 가고, 이젠 고마움이 퐁퐁 솟아올랐다. 아니, 솟아오르다 못해 마음 가득 홍수를 낼 지경이었다.

 

 

 "어, 야, 울어?"

 

 

 난데없이 눈물을 떨어뜨리는 지성에 당황한 제노는 끼고 있던 팔짱을 풀고 고개를 숙인 지성의 옆에서 온갖 부산은 다 떨었다. 그 큼지막한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는 통에 눈물을 닦아주지는 못한 채 그 위를 살살 쓸기도 하고 등도 간간이 토닥이며 이유를 모를 지성의 울음을 달래려 애썼다. 하지만 이런 제노의 손길이 지성에게 닿으면 닿을수록 지성은 몸까지 들썩이면서 눈물을 쏟았다. 그 덕에 안 그래도 저를 피하는 지성의 태도에 온갖 나쁜 상상으로 머릿속이 시끄럽던 제노의 속은 타들어 갔다. 마치 나쁜 상상이 현실이 될 것만 같은 기분에 제가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한편 지성은 이제까지 제가 헛짓거리를 했음을 너무나도 절절히 깨닫고 있던 참이었다. 이제노는 공부한다고 혼자 가라고 해놓고는 수업 종 치자마자 교실 뒷문에서 저를 기다렸고, 아이스크림 7개를 사 와서는 제 것이 없다고 놀리다가도 꼭 제가 좋아하는 종류는 꼭꼭 손에 쥐고 있다가 챙겨주었고, 제가 맛있겠다 한 빵을 입안에 쑤셔 넣고는 그다음 교시에 새것을 사다 주었다. 그뿐이랴. 이제노는 살찐다고 잔소리하면서 손으로는 배달 앱을 켜고 있었고, 재민과 전화를 끊던 이제노의 귀는 빨개져 있었고, 덩칫값을 못한다면서도 목덜미를 조물조물하며 아끼는 티를 팍팍 냈다. 겉으로 무심하고 건조하기 그지없는 말투에 깜빡 속아 넘어가 저를 향한 눈빛을 읽어내지 못했다. 이 모든 게 순간의 기분에 휩쓸려 탈선해버린 제 생각 기차가 벌인 일이라고 생각하니 미안함에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지성아, 나는 다 이해해. 그러니까 울지만 말고 대화로 풀자. 응?"

 

 

 제노는 답지 않은 다정한 말까지 써가며 지성의 얼굴을 보려고 애썼다. 노력에 답하듯, 손이 사라지고 마카롱이 나타났다. 퉁퉁 부은 마카롱은 한참을 제노와 눈을 마주하지 못하고 방황하다가도 끈덕지게 따라붙는 시선에 결국 항복을 고했다. 드디어 마주한 시선에 제노는 지성의 속내를 읽어내려 애썼다. 하지만 도통 해석 불가능한 눈빛만 받아내고 지성이 그 속내를 직접 언어로 구사하는 것을 기다리는 것을 선택했다. 누구 하나 먼저 입을 열지 않은 채 눈길만 오가는 침묵이 교실에 가득 차올랐다. 그리고 그 침묵을 깬 건 지성의 볼륨 0.7짜리 사과였다.

 

 

 "....미안해요."

 

 "....뭐가 미안한데?"

 

 "...내가 형 피하는 동안 많이 생각했는데, 아니 생각하느라 형을 피했는데, 그래서 미안해요."

 

 "생각하느라?"

 

 "아니, 그냥 갑자기 형한테 서러워서..."

 

 "서러웠어?"

 

 "아니, 맨날 나한테 뭐라 하고 그러니까 조금..."

 

 

 지성은 심각해진 제노의 표정에 잔뜩 긴장해 허리를 곧추세웠다. 제노의 미간 사이 주름이 깊어질수록, 그를 바라보는 지성의 몸도 점점 딱딱하게 굳어갔다. 혹시나 제노 형이 내 말을 오해해서 그만하자고 하면 어쩌지. 내가 여태까지 한 행동이 있으니까 충분히 그럴만한데. 온갖 고민이 입술에 덕지덕지 붙어서 입을 떼는 것을 어렵게 했다. 하지만 방금 얻은 교훈에 따르면, 이렇게 생각만 하다간 좋지 못한 결과를 나올 위험이 있었다. 그래서 입을 열었다.

 

 

 "아니, 그런데 이제는 안 그래요. 나 다 이해했어."

 

 "무슨 뜻이야?"

 

 "그냥...형이 나 이뻐하는 거 알았다구요, 이제."

 

 

 온통 뜻을 알 수 없는 말을 하고는 퉁퉁 부은 눈으로 생글생글 웃는 지성에 제노는 할 말을 잃었다. 일차적으로 웃는 모습을 오랜만에 봐서, 이차적으로 도대체 무슨 뜻인지는 몰라도 제가 생각하던 최악은 아닌 것 같아서, 그리고 무엇보다도 웃는 게 이뻐서. 시끌벅적 제 말만 떠들어 대던 머릿속 온갖 상상들이 박지성 웃는 거 한 번에 싹 불타 사라진 것이 세삼 내가 이 아이를 정말 좋아하는구나 싶어 절로 웃음이 났다. 그래서 온종일 박지성에게 어떤 말을 해줄까 구상해두었던 모든 시나리오를 지우고 즉흥적으로 무대를 꾸몄다. 쓰다듬고 싶던 머리를 쓰다듬고 말랑말랑한 볼도 쭉 잡아당겨 보고 목덜미를 끌어당겨 얼굴을 맞대고 두 눈 가득 박지성을 담아냈다. 가까워진 얼굴에 동그랗게 눈을 뜨며 놀란 티를 마구 내는 박지성이 사랑스러워 죽을 것만 같아 곧장 입을 맞췄다. 가만히 입술만 맞대고 있으니 입술 너머로 무언가 우물우물 움직이는 것이 느껴졌다. 잠시 후 살며시 제 입술을 할짝대는 촉감에 제노는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그대로 지성의 혀를 감아올렸다. 질척이는 소리가 교실 가득 울리는 것만 같아 지성의 목덜미를 받치고 있는 손에 잔뜩 힘이 들어갔다. 그렇게 이제노는 정신없이 사랑스러운 박지성을 정신없이 물고 빨았다.

 

 

 오랜만에 함께 하는 하굣길에서 눈이며 입술이며 퉁퉁 부은 박지성은 쫑알댔다. 이제노는 적당히 대꾸하고는 바르르 떨며 놀리지 말라고 찡찡대는 박지성을 보고 실실 웃음을 흘렸다. 박지성의 큼지막한 손이 이제노의 단단한 손 속으로 파고들었다. 이제노는 한술 더 떠서 박지성의 길쭉한 손가락 사이사이에 제 손가락을 끼워 넣었다.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얽힌 손가락 사이로 잔뜩 힘을 주니 사이에 먼지 한 톨도 못 들어가도록 조금의 공간도 남기지 않고 손바닥이 밀착되었다. 그렇게 그들은 서로에게 갇힌 손을 뺀다며 장난치고 간간이 핏줄이 살짝 오른 손등을 엄지손가락으로 살살 쓸어보며 달콤한 연애의 순간을 즐겼다.

 

 

 입은 곱지 않아도 저를 향한 시선이 달달한 이제노를 바라보던 박지성은 연애의 정의랄게 별건가 싶었다. 즐기면 좋은 연애고 아프면 나쁜 연애인 거였다. 그리고 그런 점에서 저는 좋은 연애를 하고 있다. 이제노와 함께 하는 매 순간이 즐거워 죽을 것만 같으니까.

    JENSUNG 1st Collabor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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